욕망의 메타포로서 뱀파이어 모티브 : 경계 짓기와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괴테의 <코린트의 신부>와 F.W.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를 통해 -
  

1. 뱀파이어, 메타포의 향연

뱀파이어 모티브가 현대의 대중에게 있어 지극히 진부하며 통속적인 소재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날카로운 송곳니와 피, 십자가와 성수, 햇빛, 말뚝, 마늘, 박쥐 등의 상징은 가상의 존재인 뱀파이어에 대한 인류 공통의 기억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그러한 전형성은 뱀파이어라는 문화적 소재의 품위를 떨어뜨리는데 크게 일조하고 있기도 하다. (오늘날 뱀파이어가 B급 공포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통속성은 뱀파이어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의 방증이기도 하다. 고대의 민담, 신화, 전설에서부터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벨라 루고시 주연의 <드라큘라>, 닐 조단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 등에 이르기까지 뱀파이어 모티브는 그것이 거쳐 온 다양한 변형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정형화된 이미지로 정착하면서 수세기에 걸쳐 대중을 매혹시키며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되어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뱀파이어는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문화 예술의 소재로서 사랑받아왔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뱀파이어를 소비하는 문화주체, 즉 대중의 욕망을 자극할 수 있는 특정한 상징들이 뱀파이어의 존재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상에 존재하는 뱀파이어는 삶의 욕구와 죽음의 욕구에 대한 대리체험을 선사하며, 날카로운 송곳니, 흡혈 행위, 매혹성 등은 본능적인 욕구로서의 섹슈얼리티의 문제와 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또한 그것은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 않고도 공포를 소비하고 싶은 대중의 심리를 자극하기도 하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신에 대한 저항 혹은 사회적인 억압, 구속에 대한 안티 테제로서 기능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뱀파이어는 욕망의 투사로서 다양하게 읽힐 여지가 있기에,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괴테의 <코린트의 신부>와 F.W.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를 비교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다. 두 작품의 서사구조는 뱀파이어 모티브를 통한 사랑, 죽음, 자기해체의 동일한 과정을 따라가고 있으며 그러한 스토리 라인은 자연스레 당대의 시대사적인 맥락과 연관되어 있다. 특히나 뱀파이어에 대한 타자화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뱀파이어와 인간 사이의 사랑을 어떠한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가 두 작품을 연결하는 핵심 고리가 될 것인바 이하에서는 경계 짓기와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경계 짓기 : 타자화를 통한 배제와 낯설게 하기

뱀파이어는 인간과 신, 정상인과 괴물, 낮과 밤, 순결과 타락, 이성과 광기, 삶과 죽음의 경계선상에 있는 매우 불완전한 존재이다. 뱀파이어의 이러한 위태로운 존재성은 신성한 흙이 가득 찬 관에서 살아야만 하는 노스페라투 백작의 아이러니에서도 단적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뱀파이어의 존재는 인간에게 있어서 매우 낯설고 기묘하며, 비정상적이고, 불건전하며, 위험하기까지 하기에, 인간은 그로 인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그를 타자화 함으로써 ‘우리’와 그를 구분지으려 한다. 따라서 뱀파이어는 인간세계에 침입하기 위해 필사적이며, 인간은 그들을 출입시키지 않으려고 또한 필사적이다. 경계를 넘어서려는 자를 막고 경계를 새로이 그어냄으로써 인간은 스스로 ‘인간임’에 안도하고, 내면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타자는 문제 자체이고 문제는 어느 사회에서나 억압되”기 마련이라는 영화 평론가 김정룡의 언급처럼 ‘우리’와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타자화를 통한 배제의 과정이 필연적인 것이다.

<코린트의 신부>에서 뱀파이어로 묘사되는 죽은 처녀는, 뱀파이어가 가진 낯설음, 비정상, 타락함, 외설스러움 등의 속성과 절묘하게 연관된다. 기존의 가족관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성애를 죄악시하고 육체적인 쾌락을 불경시하는 보수적인 윤리관, 인간성을 억압하는 기독교 가치관 등 18세기 말 19세기 초 빅토리아 시대 유럽의 분위기 속에서 처녀의 자유로운 연애관은 ‘몹쓸 창녀’라는 주홍글씨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존 사회에서 용인될 수 없었던 개인 내부의 본능적인 욕구, 감성의 추구는 뱀파이어처럼이나 사회와 융화되기 어려운 무언가였음에 틀림없다.

<노스페라투>에서는 그러한 경계짓기에 관한 사회의 욕구가 보다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뱀파이어인 노스페라투 백작은 전염병을 옮기고, 건강한 사람의 피를 빨아들이는, 사회적으로 매우 유해한 존재이다. 그의 창백한 피부와 괴기스러운 얼굴, 허약해 보이는 신체, 짐승과도 같은 손, 어찌보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툭 튀어나온 앞니는 이후 흡혈귀의 대명사로 불리는 벨라루고시의 말끔하게 쓸어올린 머리와 깔끔한 턱시도, 날카로운 송곳니, 성적 매력을 자아내는 단단한 육체 등과 비교하여 볼 때 혐오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외모이다. 또한 그는 시체를 갉아먹고 전염병을 퍼뜨리는 더러운 동물인 쥐로 변신하기도 하고, 파리를 잡아먹는 정신병자 노크를 하수인으로 두고 있다. 즉, 노스페라투는 그 자체로 매우 불쾌하고 더러운 이미지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노스페라투’에 대한 이러한 혐오는 1920년대 전후의 독일의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1919년 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패망으로 막을 내렸고, 미국 주도로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 영토에 대한 제한과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함으로써 이후 독일은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폐한 상태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패전과 혼란의 와중에서 탄생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시대적인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1923년까지 내란의 음모와 좌우세력의 폭동에 시달렸고, 독일경제는 물가의 폭등과 실업, 식량부족하에서 쇠퇴일로를 걷고 있었다. 전후 독일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혼란은 독일인의 자긍심에 크게 상처를 입혔으며, 그 와중에 사람들은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공황상태에 빠져있었다. ‘노스페라투’ 백작은 그러한 사회상 혹은 그로 인한 극심한 공포를 상징하고 있으며, 백작의 혐오스럽고 동물적인 이미지는 그와 ‘우리’ 사이의 공통점을 줄임으로써 그를 내부로부터 쫓아내려는 전후 독일의 사회적 욕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스페라투>에서 그러한 경계 짓기의 과정은 매우 우회적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아주 잔인한 것이 된다. 영화에서 사실상 ‘노스페라투’는 환상이나 민담 속 뱀파이어가 아닌 전염병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으나 사람들은 공포를 극복하기 위하여 그것을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일을 거부하며, 그로 인한 혼란을 해결하기 위하여 노크라는 스케이프고트를 만들어 낸다. 독일이 상처 입은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혼란’과 ‘공포’의 존재를 인정하기 보다는 파괴적인 충동을 약자에게로 표출함으로써 불만을 해소하는 일이 훨씬 용이 했던 따름이다. <노스페라투>가 1933년 히틀러의 집권을 예고하였다는 혹자의 평가가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니는 까닭이 바로 그 때문이다. 희생당하는 대상은 그것이 유대인이든 장애인, 동성애자, 그 어떤 사회적 약자이든 관계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전적으로 히틀러의 선동정치에 의한 것만도 아니었다. 제 2차 세계대전과 제노사이드의 집단 광기 안에는 가학성의 가면을 쓴 인간 군상들이 불안함과 피해의식에 침잠한 채 존재하고 있었다.

3. 뱀파이어와 섹슈얼리티

이러한 낯설고 위험한 뱀파이어에 대한 불안은 성적인 억압과 중첩되면서 공포감은 자연스레 관능적인 쾌락과 연관이 된다. 피를 모두 빨린 채 죽임을 당하게 될 수 있다는 섬뜩함은 동시에 뱀파이어에게 피를 빨리는 황홀경과 동시에 찾아오며, 그것은 흡혈이라는 행위에서 느껴지는 성적 쾌락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뱀파이어의 송곳니는 남성의 성기를 연상시키며 흡혈행위는 성교의 과정과 맥이 닿아 있다. 영원불멸의 죽음이라는 역설은 사랑의 감정을 보다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것으로 미화시키며,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대상과의 성애는 금지되어 있기에 더욱 매력적이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뱀파이어 이야기는 섹슈얼리티의 문제와 분리 될 수 없다.

<코린트의 신부>에서 청년은 처녀가 ‘무덤에서 돌아’온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끊임없이 ‘사랑을 요구’하고, 뱀파이어라는 존재적인 한계와 내부의 성적 욕구 사이에서 갈등하던 처녀의 허락을 시작으로 청년과 처녀는 결국 성적인 욕망을 거침없이 표출한다. 이러한 둘의 격렬한 사랑의 과정은 닭이 욺과 동시에 노여움을 참지 못한 어머니의 등장이 있기 전까지 여과 없이 직접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청년은 그러한 사랑을 추구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처녀는 청년의 마음을 확인하는 정표로서 머리카락 한 올을 청하는데 그것은 어느 정도 청년의 희생을 처음부터 담보하고 있었다는 상징으로 읽힌다. 영혼이 거주하는 머리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은 머리카락은 생명의 순환과정 그 자체로서 고대부터 성스럽게 여겨지던 신체의 일부였다. 그것을 저당 잡힌 채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금지된 열정을 분출한 청년은 결국 처녀에게 피를 빨린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메타포는 <노스페라투>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여주인공 엘렌과 노스페라투 백작의 관계는 연인사이처럼 묘사된다. 엘렌은 노스페라투에 관한 책을 읽고 싶은 유혹을 견디지 못하며, 엘렌이 짜는 베에 적힌 ‘Ich liebe dich’라는 글귀도, ‘그가 오고 있다’는 표현도 남편(혹은 약혼자) 허터를 향한 것인지, 노스페라투를 향한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게다가 창문을 사이에 두고 노스페라투 백작과 교감을 나누는 모습 역시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면서 (물론 노스페라투 백작의 모습에서 로미오를 떠올리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엘렌과 노스페라투의 관계가 사랑하는 남녀관계임을 짐작케끔 한다. 또한 피를 빨기 전 노스페라투의 그림자는 엘렌의 심장이 있는 왼쪽가슴을 움켜쥐는데, 이 때 엘렌이 기절하는 모습도 성관계에서 느끼는 황홀경을 떠올리게끔 한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 역시 사회적으로 부도덕하며, 그렇기에 용납될 수 없다. 엘렌은 성욕을 만족시키는 대가로서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엘렌의 욕망은 ‘순결한 여성’이기를 요구하는 사회에 대한 도전이며, 그 결과는 그녀에 대한 사회의 응징인 것이다.

이렇듯 <코린트의 신부>와 <노스페라투>에서 사회의 금기에 도전하여 자유로운 감정을 그대로 분출하는 두 인물은 모두 죽음이라는 결말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러한 죽음을 비관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청년과 엘렌은 ‘죽도록 사랑’했고, 죽음으로서 그들은 영원불멸의 사랑을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4. 죽음을 통한 자기희생 : 낯설음의 자기화(自己化)와 화해

프로이트의 논문, ‘섬뜩함에 관하여’는 뱀파이어라는 낯설음을 차용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 두 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시한다. 그에 따를 때, '우리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서 섬뜩한 것(Unheimlishes)은 본디 우리에게 낯익고 친숙한 것(Heimlishes)이 억압되고 은폐됨으로써 생성된 것이다'. 섬뜩한 것(Unheimlishes)와 친숙한 것(Heimlishes)을 구분해주는 것은 Un-이라는 접두어이다. 이 접두어는 억압의 표시이고, 이것은 결국 종이 한 장 차이와 같다. 즉, 섬뜩한 것, 공포스러운 것은 곧 낯익고 친숙한 것에 의해 가려져 있는 것, 곧 우리의 내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는 말인 것이다. 오랜 시간 뱀파이어와 인간간의 경계선을 확정하려는 수고를 자처하면서, 이성, 사회에 대한 책임감, 기독교 신앙, 밝은 미래에 대한 신념, 전통적인 가족관계의 고수 등을 인간적인 것의 표상으로 들기를 주저하지 않았지만, 실은 뱀파이어로 대표되는 감성과 정열, 본능적인 성욕, 혼란, 공포 역시 인간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무언가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끊임없이 구분하기를 애쓰는 주체로서의 ‘우리’와 객체로서의 ‘그들’이 결국은 같은 집합에 속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 그것은 바로 밤에만 은밀히 이루어지는 인간 내면 욕망의 발현이며 진정한 자기(自己)를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코린트의 신부>의 마지막 연에서 처녀는 ‘화염속에서 사랑의 안식을’ 얻기를 원하면서 어머니에게 화장을 시켜줄 것을 청하고 있는데, 이미 죽은 자의 죽음이라는 역설적인 상황에서 독자는 사회적 억압과 본능적인 욕구의 충족사이에서 화해를 모색하는 처녀의 숭고한 자기희생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옛 신들에게 돌아갈 것을 희구함으로써, 처녀의 성적이고 육체적인 쾌락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충만함으로 승화되며, 인간성(人間性)으로서의 감성과 신성(神性)으로서의 이성은 처녀의 고결한 죽음과 함께 조화로운 합일을 이루게 된다. 즉, 처녀의 몸이 불에 타서 재가 됨과 동시에 뱀파이어로 표현되는 낯설음과 청년과 처녀의 정열이 기존의 이데올로기와 화합하여, 사회가 희생시킨 처녀의 ‘몸’을 보다 완결된 인간의 그것으로 체현시켰던 것이다.

<노스페라투>에서도 이러한 자기 해체의 과정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엘렌의 죽음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데, 이것은 ‘노스페라투’ 백작으로 상징되는 당대의 혼란과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초인의 등장을 희구하는 시대적 분위기와 연관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엘렌은 고결한 자기희생을 통해서 혼란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가진 여성이었고, 그녀의 희생에는 희생양을 통해 혼란과 공포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정면으로 맞서서 그러한 어두운 모습도 자신의 일부임을 인정할 때라야 만이 그러한 공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노스페라투는 해가 뜨자마자 재가 되어서 사라지고 마을을 휩쓸고 간 공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 브레멘임을 기억할 때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버트가 브레멘에서 태어나 활동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그런데, 엘렌의 자기희생은 앞서 언급했던 섹슈얼리티의 문제와 묘하게 연관을 맺고 있으므로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엘렌은 표면적으로는 도시를 구한 영웅이었지만 보다 심층적으로 살펴보면 결국 그녀는 금기를 깨고 사회적으로 부도덕한 성적 욕구를 충족시켰던 것이며, 따라서 그녀의 영웅적 행위는 단죄받아야 할 부정(不貞)한 욕망에 지나지 않았기에 브레멘 사람들은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뱀파이어를 물리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은 왜 처음 뱀파이어와 관계한 하커나 이성과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불버 박사가 아니라 ‘여성’인 엘렌이어야만 했는가? 뱀파이어의 유혹자로서의 여성은 왜 ‘순결’해야만 하는 것인가? 이 같은 질문은 당시에 가해지던 - 그리고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 여성성에 대한 사회적인 구속을 짐작하게끔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설정을 통해 무르나우가 여성의 몸에 대한 억압과 성적 욕망에 대한 터부를 생산 해내는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려 했던 것인지, 혹은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부정(否定)하는 엘렌을 죽임으로써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공고화하고, 사회적인 안정을 이룩하려 했던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엘렌의 죽음 이후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엔딩 크레딧 역시 그러한 모호함을 증폭시킨다. 작가가 엘렌의 죽음에 대한 어떠한 평가도 내리지 않은 채 작품을 끝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영화가 노스페라투의 등장, 그와 엘렌의 사랑, 엘렌의 죽음에 이르는 일련의 시퀀스 안에서 1920년대 초 독일에 내재하는 다양한 욕망을 반영하는 프리즘으로 매우 잘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결국 그것은 노스페라투를 배제함으로써 느끼는 당대인들의 심리적인 안정의 실체를 폭로하고, 한 여성의 희생을 통해서 노스페라투로 대표되는 혼란과 공포를 극복하려는 작가의 욕망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5. 마치면서

문학 평론가 김현은 <소설을 왜 읽는가>에서 ‘소설속에는 세 개의 욕망이 들끓고 있다’고 말한다. 그 하나는 세계를 변형하려는 소설가의 욕망이요, 또 다른 하나는 소설가의 욕망에 상응하는 혹은 그것에 반대하는 소설 속 주인공들의 욕망이요, 마지막 하나는 그것에 참여하는 독자의 욕망이다. 우리는 소설을 왜 읽는가? 김현에 따르면 ‘그 질문은 이 세계는 살 만한 세계인가, 이 세계의 현실 원칙은 쾌락 원칙을 어떻게 억누르고 있는가 하는 질문과도 같다. 그 질문을 통해 "여기 내 욕망이 만든 세계가 있다" 는 소설가의 존재론(存在論)이 "이 세계는 살 만한 세계인가?" 하는 읽는 사람의 윤리학과 겹쳐진다...일상성 속에 매몰된 의식에 그 반성은 채찍과도 같은 역할을 맡아 한다. 이 세계는 과연 살 만한 세계인가, 우리는 그런 질문을 던지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김현의 대답이 비단 소설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코린트의 신부>와 <노스페라투>에 있어서도 우리는 동일한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계는 과연 살만한 세계인가? 괴테와 무르나우 모두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이 욕망하는 세계를 제시한다. 그것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인간 내부의 문제로 치환되기도 하며, 사회사적 맥락에서 현실비판적인 텍스트로 읽히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이 제시하는 또 다른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이 세계는 과연 살만한 세계인가? 내가 욕망하는 세계는 당신이 보기에 어떠한가?” 두 작품에서 뱀파이어 모티브를 통해 제시되는 문제 의식들 - 이른바, 경계짓기를 통한 배제, 육체 혐오주의, 여성성에 대한 억압의 문제 등 은 이미 해결된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진행중인 현재의 문제들이다. 매몰된 일상에서 벗어나,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과 철처한 각성이 요구되는 지금이다.



<참고 문헌>

*1차자료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코린트의 신부(Die Braut Von Korinth)>, 1799.
(출처 : http://dragon.seowon.ac.kr/%7Ejeronimo/gedicht/goethesballade/korinth.htm 검색일 : 2008.10.19)
F.W. 무르나우, <노스페라투(Nosferatu, eine Symphonie des Grauens)>, Prana, 1922

*2차자료
김정룡, 「공포영화에 대한 잡념」
(출처 : http://blog.naver.com/taijin0227?Redirect=Log&logNo=20012660247 검색일 : 2008.10.19)
김현, 「소설을 왜 읽는가」, 『고등학교 국어(하)』, 교육부, 1996.
박래식, 『이야기 독일사』, 청아 출판사 2006.
이진이, 「뱀파이어, 내안의 광기와 열정을 만난다」, 2005에서 재인용.
정성일, 「나치 등장 예고한 공포영화 노스페라투」, 1996.

by namu | 2008/10/20 00:53 | 영화리뷰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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